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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야 향기는 바람에 흩날리고 3
2003년 01월10일 14시 27분에 작성하셨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 그곳의 계절은 나름대로의 겨울이란다.
33도 정도의 날씨를 춥다고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있는 현지인들은 반바지 차림의 우리에게
"미친 놈들, 한겨울에 차가운 바다 물이 뭐가 좋다고 저 난리야" 라는 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고
우리는 "온 여름에 무슨 찜 쪄 먹자고 긴 옷을 입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을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상하의 나라인 그곳은 기온이 30도 이하로 1도만 내려가도 현지인들은 입술이 새파래지고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선풍기형 난로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니
춥고 덥고의 차이도 나름인가 보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방콕의 초특급 호텔인 상그릴라에서 근사한 디너가 마련되었다.
한국인들은 예외 없이 강가에 면한 전망 좋은 곳에 예약이 되어 있었고
서양인들은 모두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실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옆 자리에 고급 양주를 서너병을 비워 놓은 한국인 6명이
술에 만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차오프라야강 위로 떠 다니는 유람선과 강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여름 밤의 정취가 무색해 졌고
웨이터를 불러 조용히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도 어쩌지를 못했다.
그제서야 왜 한국인들을 서양인 신사들과 격리시켜 놓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상그릴라에서의 디너는 동족의 비극(?)적 상황만 제외한다면 최상급이었다.
음식은 모두 훌륭했지만 나는 숯불에 통째로 구운 싱싱한 바닷가재와 '파파야'라는 과일만을 먹어댔는데,
바닷가재를 20마리 정도를 아귀처럼 해 치우고도 탈이 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건위제의 역할을 한다는 파파야라는 과일 때문이었으리라.
일행들은 파파야 과일의 맛을 "니 맛도 내 맛도 없다"고 하기도 하고
"삶은 당근에 물 탄 향수를 끼얹은 맛" 이라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이 파파야 라는 과일의 맛에 심취하여
호텔에서 제공되는 아침과 저녁 식사 때마다 윗배가 그득하게 불러올 때까지
파파야를 먹어대곤 하였다.
열대과일 중에서도 '순자 과일'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있다.
본래 이름은 '람부탄' 인데 울긋불긋한 뿔들이 밤송이처럼 달려 있는 자주색 과일이다.
버마사태로 폭탄이 터져 급하게 숙소를 옮긴 영부인께서는 사람이 죽어나간 그 와중에
파자마 바람에 밤새 이 과일을 까 드셨다고 한다.
한국의 경호원들이 태국의 경호원들에게 "왜 우리 허락도 없이 과일을 영부인께 올렸느냐"며 강력히 항의하자
"너무 맛있게 드시길래 한 박스 올렸다"고 했고
이어 경호원들도 먹어 보았는데 너무도 맛있어서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만 먹다니..." 하고
모시던 영부인을 원망하였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는 과일이다.
망고, 망기스, 두리안, 시삭, 리치, 람부탄, 구아바, 롱간, 코코넛 등
생김새도 다양한 여러가지 열대과일은 나의 호기심과 탐험욕을 자극하였지만
그 중에서 파파야는 목이 긴 여인처럼 단연 두드러졌다.
파파야는 어쩐지 태국 사람들의 미소를 닮았다.
수박의 속살처럼 붉은 과육을 지그시 깨물면 언젠가 한번 탐미해 보았던 푸아그라 요리처럼 부드럽게 으스러지는 질감하며,
밍밍하지만 슬그머니 젖어 드는 향기는
영락없는 태국 사람들의 미소 그 자체였다는 것이 내가 내린 최종 결론이다.
겉 모습은 호박과 수박의 중간 형태로 촌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속 맛은 지극히, 지극히도 우아한 향취와 입 속에서 아무 저항 없이 허물어지는
그토록 부드러운 질감은 살아오면서 먹어본 어떤 과일과도 비슷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과일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연서이다.
나는 지금도 파파야 향기를 못내 그리워한다.
날씨가 건조하여 입술이 매마를 때면,
남쪽 나라에서 편서풍을 타고 날아온 파파야 향기는 나의 미감을 슬그머니 건드리고,
이어진 그네들의 뻥 뚫린 미소,
말갛게 웃던 그 웃음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스산한 내 마음을 다독여 줄 파파야 향기가 은연한 그곳에, 다시,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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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