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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 황석이 2
황석이가 왔다.
독일로 간지 5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방학을 이용해 한달 보름 정도 있다 갈 예정이란다.
열흘전 황석이가 전화로 9월초쯤에 한국을 다녀갈 것임을 알렸을 때
나는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뻤다.
괜히 혼자서 "키스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까지를 멀리멀리 공상하고 고민했을 정도로,
마치 말 못할 사정으로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들떠있었다.
예정을 앞당겨서 그가 불쑥 나의 일터로 찾아왔을 때
녀석을 한아름에 포옹했을 정도로 눈물이 날만큼 반가웠다.
그리고...
두시간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자 황석이란 놈은
'어제도 만났고 그제도 만났던 그냥 적당히 지겨운 그 놈'이 되고 말았다.
역시 황석이는 내 친구이고 나의 머슴놈이었던 것이다.
놈이 동의하거나 말거나.
2년전 놈이 귀국했을 때는 '독일놈스럽다'고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독일놈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아닌 여자를 영국여자라고 하듯이
도대체 아닌 남자를 일컬어 독일남자라고 하지 아닐까 생각된다.
'독일놈이 됐다'는 의미는 예를 들자면
놈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너 왜 그래?' 라고 반문할라치면
놈은 "두가지로 해석이 되지, 하나는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했을 가능성과
두번째는 저러저러해서 저랬을 가능성이 있지"하는 투다.(솔직히 좀 재수없다)
분석하기 좋아하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독일놈들을 가리켜
유럽 여성들이 연애하기 좋은 상대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얘기하면 놈은 "누나, 독일 가봤어?"라고 들이댄다.
독일이래야 5일인가를 머물렀던 것이 고작이고
그것도 대개는 관광지였으니 내가 독일을 안다고 하면 웃기는 노릇이지만
서울 사람보다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서울을 잘 아는 법이다.
서울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어도 롯데월드나 육삼빌딩 수족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지방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가보았던 서울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은 ...", "서울 사람들은 ... " 이런 말들을 자주 한다.
나는 서울이 어떤 곳인지 서울사람이 어떤 특징을 갖는지 한마디로 요약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놈은 더치페이의 지불방식만 제외하고 결혼과 여자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나
분석하고 규정하려는 다분히 재수없는 어투에서 독일놈이 다 되어 오긴 왔는데,
다분히 인종주의적인 게르만놈들에게서 어떤 풍상을 겪었는지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30대 중반인 놈에게 늘상 하던대로 '이 새끼, 저 놈' 할 수도 없고
머슴놈한테 깍듯하게 대하기도 마님 체면 문제가 달려있어
조만간 협의 하에 버전을 수정해야 할 것도 같다.
어찌 됐든 놈은 내가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놈이고
그래서 나는 놈을 만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늘 검은 옷을 즐겨 입는 놈은 다분히 스타일리스트적인 면이 있는데
검은 색 옷을 주로 입는 남자들은 대개 '폼생폼사'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주 황석이, 선영이, 수철이(유명인사인 관계로 가명 사용)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정호는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하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황석이와 수철이 두 놈이 어느 공영주차장에서 안고 뒹굴기 시작하더니
에너지가 넘쳐 어쩌지 못하겠는지 씩씩거리면서 엉겨붙었다.(장면4)
흡사 한편의 마임극처럼 '흡', '헉', '윽' 하는 절제된 소리만을 내며
엎치락 뒤치락 하는 두 놈들은 팔다리가 온통
아스팔트에 긁히고 까져서 피가 맺혔음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처음엔 "야, 이놈들아, 다 까진다. 적당히 해라" 며 말리는 척도 했지만
"저러고 싶은 거겠지" 하는 마음이 들어 '"잠깐!", "정지!"를 외쳐가며
짐승처럼 얽혀있는 놈들을 열심히 로모로 찍어댔다.
30분 이상을 기를 쓰던 놈들은 드디어 지쳐서 헐떡이다가 바닥에 大자로 누워버렸다.
나도 기운이 떨어져(이 나이가 되니 노는 것도 힘이 든다)
가로등 아래 앉아서 반짝이는 네온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21세기의 밤하늘의 별은 다름아닌 네온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서울의 밤거리는
암스테르담의 밤거리처럼 마약중독자들이 널브러져 있지도 않았고
사위가 고적하니 나쁘지 않았다.
"저 내온은 나의 네온, 저 네온은 너의 네온,
별빛에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
이런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황석이 놈은 체류기간 동안 학비라도 벌 심산으로
신축건물의 스테인글라스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니
나와 데이트 할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영상을 공부하고 있는 놈의 홈페이지를 내가 만들어 주기로 약속하였으니
지겨워도 자주 만나야 할 것 같다.
다음 주쯤에는 영화관람과 수원으로의 소풍,
그 다음주에는 조치원 촌놈시인한테 갈 계획을 잡고 있다.
만만하고 편한 놈 하나쯤 옆에 두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무인도에 둘만 남게 되거나,
혹시 그럴리야 없겠지만 놈의 페로몬이 나의 뉴런을 심각하게 자극하여
잠깐 헷갈리는 일이 예기치 않게 생기더라도
값싼 연애질로 오랜 친구를 잃어버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연애할 남자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겠지만
쓸만한 머슴놈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 처럼 아주 힘들기 때문이다.
<#상황1>
(황석이는 앉고 나는 선다. 선영이 카메라를 들고)
선영: 언니, 좀 더 다정한 포즈로
나 : 좋아, 그럼 내가 황석이 무릎에 앉지 머.
황석: 아니, 이 여자들이 왜 이래. 어 어 어어어...
나 : 가만히 있어, 이놈아.
황석: 우우~ 안돼, 난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한단 말이야.
(찰칵, 찰칵, 찰칵)
나 : (손을 털며) 야, 이놈아, 너 나한테 흑심 있냐?
내가 니 무릎에 앉으면 전기가 찌르르 하고 오디?
못된 놈. 씅큼한 놈. 감히.
<#상황2>
(황석이가 카메라를 들고 선영과 내가 포즈를 잡는다)
선영: 언니, 우리 레즈비언이 아닐까?
나 : 맞아, 나 너 사랑해.
<#상황3>
(주점에서, 수철이 '#상황1'을 브리핑 받는다)
수철: 누나, 그러면 흑심이 없으면 누나한테 뽀뽀해도 돼?
나 : 음... 뽀뽀면 괜찮아.
(선영이 찰칵 하고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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